컨텐츠 바로가기


board


현재 위치

  1. 게시판
  2. 커뮤니티

커뮤니티

이곳은 자유게시판입니다. 문의는 제품관련 Q&A로 해주세요. 여러분들의 재미난 이야기나 좋은 정보 올려 주세요~~~**

124군부대와 실미도부대
제목 124군부대와 실미도부대
작성자 운영자 (ip:)
  • 작성일 2005-04-24 23:37:37
  • 추천 0 추천 하기
  • 조회수 623
  • 평점 0점

 다음은 [공수한가족]이란 사이트에 있는 내용을 퍼온 것입니다.

 

 

실미도 영화를 쎄웠소.
생각보다 실망스럽지만 뭐 나름대로 볼만한 영화였소.
대략 실미도와 관련된 몇가지 잡설을 늘어 놓을까 하오.

1. 실미도 684는 과연 북한 주석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부대일까?

○ 생짜 초보자 부대 ○
미국 LA市 SWAT나 프랑스의 GIGN등은 기본적으로 5년 이상의 경력자만
지원할 수 있다고 하오 유명한 영국 SAS나 미국 델타포스등도
코만도부대나 레인져 부대에서 몇년씩 근무하고 나서야 지원이 가능하오.
그런데 군대 경험도 없는 자들로 특수부대를 만든다니 이상하지 않소?
당시 울나라에는 수차례씩 북한을 오간 북파특공대가 여럿있었고, 월남에
서 실전을 겸험한 병사도 많이 있었으며, 6.25가 끝난지 겨우 15년이
지났을 뿐이므로 6.25의 백전노장들도 30대 중반으로 아직 쌩쌩했소.
게다가 북한에서 가족을 월남한 골수반공주의자들이나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들 공산당의 학살에 가족을 잃은 전쟁고아 등.
'전투가 아닌 테러'에는 더욱 어울리는 자원이 넘치고 있었는데 왜
하필 전과자와 사회 부적응자들을 모아서 부대를 만들었겠소?

○ 실현 가능성 없는 작전 ○
국가 원수의 암살에 성공한 예는 많으나 수십명의 무장병력을 적국에
침투시켜 암살한 예는 거의 없소 대략, 국가원수의 암살은 대개
공식행사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소. 군사퍼레이드중 트럭에탄
쿠테타 병력의 일제사격에 죽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카 퍼레이드
중 저격당한 케네디 대통령, 기념행사에서 시민들과 악수를 나누던중
허리에 폭탄을 감은 여자가 자폭하여 죽은 인도의 네루 수상, 박정희
대통령이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을 받았던 것도 8.15광복절 행사였소
이처럼 공식행사를 노리는 것은 국가원수의 행보는 특급비밀로서
공식행사가 아니면 어디있는지 알수 없기 때문이오. 청와대에 들어가
본 적은 없으나 대충 주변을 둘러본 즉 웬만한 대학교 캠퍼스보다
큰 것으로 알고 있소. 주석궁도 그 정도는 되지 않겠소? 겨우 31명의
병력이라면 주석궁 안에 들여 보내주더라도 김일성이 있는 건물을
찾고, 방을 찾아다니다 날밤을 까고 수비병력에 전멸한다에 올인 하겠소.
만일, 구태여 특공대를 투입해야만 한다면, 1~2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익숙하지 않은 지형과 현지상황을 전혀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무모한
공격보다는 영화 "새벽의 7인"에 나온 것 처럼 현지 출신으로 특공대를
구성해 현지의 고정 간첩이나 저항조직과 연계해 오랜기간동안 면밀하게
목표를 추적하여 결정적인 시기에 공격해야 할 것이오.
그렇다면, 완전무장한 31명의 병력은 너무 많고 발각되기만 쉬울 뿐이오.
민간복 차림으로 변복한 5~6명이 최적이 아닐까 생각되오

○ 겨우 4개월의 훈련 ○
실미도부대 창설은 1968년 4월, 단 4개월의 훈련 후 1968년 8월 출정하게
되지만, 돌연, 작전이 중단되오 그리고 나머지 3년은 길고긴 지루한 기다
림의 시간이었을 뿐이오.
아래 게시물 중에 강우석의 영화 실미도는 돈을 어디다 썼는지 모르겠다.
주석궁 정도는 대충이라도 만들어 놓고 침투훈련을 쎄워야 할것아닌가?
하던데... 4개월동안 건물돌입, CQB,각종 레펠, 공수훈련 등등 특햏들의
훈련을 마칠수 있겠소? 아마 실제로도 이런 것은 배우지 않고,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잡듯 몽둥이로 패가며 겨우 총쏘는 것이나 배우고,
디립다 산악구보나 쎄우고 유격이나 돌렸을 것이오 혹자들은 기간병을
몰살시킨 그들의 전투력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고의 열쇠를 입수한 훈련병들이 총을 꺼내 잠자고 있던 기
간병을 몰살했다고 하오. 물론 그들이 깨어있었더라도 실탄이 없는
빈총으로 저항할 수는 없었을 것이오. 그들의 전투력은 아무도 모르지만
소햏이 보기에 겨우 4개월의 훈련으로 세계최강의 특수병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오 아마도 요즘 특햏 31명과 실미도의 31명 특공대가 붙는다면
총이든, 칼이든, 맨주먹이든, 소햏은 요즘 특햏에 걸겠소. 생존자중
한명인 김방일씨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 암살은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증거로 훈련병들이 30M전방의 목표에 칼을 던져 맞추고
달리는 버스안에서 따라오는 운전자를 적중시킬만큼 사격술이 뛰어났다고
하던데...
설령 30미터 전방에 칼던져 맞출줄 아는 정도의 잔재주만 가지고 김일성
암살을 가능하다면 김일성이 94년까지 천수를 누리고 죽었겠소?

○ 차라리 자살 테러가.... ○
당시 우리나라에는 전쟁으로 수족을 잃은 수 많은 상이군이 있었고
가족을 잃은 수많은 월남자가 있었으며 그들은 아주 어려운 극빈의 생활을
하고 있었소. 요즘 자살테러를 쎄우는
아랍햏들의 상황보다 나쁘면 나빴지 좇치는 않았소. 그들을 침투시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공식행사장에서 폭탄테러를 쎄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오. 테러를 저지르는데 30미터 전방에 단검을 날려박고,
300미터 전방의 수박덩이를 적중시키는 사격술은 (있으면 좇치만) 없어도
그만이오. 더욱 중요한 것은 순교자를 자처할 맹목적인 정신상태와 적에
대한 적개심이오. 인도의 네루 수상과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마라,
전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훈족의 정복왕 아틸라를 암살한 사람은 최강
특공대가 아닌, 연약한 여인네, 그것도 10대 소녀들이었소.


2. 그럼 왜 이리 실현성 없는 짓거리를.....

○ 김형욱의 살기 위한 몸무림 ○
제 4대 중앙정보부장이며 미국에 망명해 反박정희, 反유신 활동을
하다 실종된 김형욱을 기억하시오? 김형욱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실미도 특공대를 만든 주역이오.
1.21사태에 대한 책음을 지고 당시 김성욱 국장장관이 해임되었으며
이후락 차지철등 실세와 갈등을 겪고 있던 김형욱 역시 궁지에 몰렸을
것으로 추측되오. 그렇다면, 그가 정적들의 공격을 받으며 살길을
찾으려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잘보이는수 밖에 없었고, 좀더 임팩트가
강한 이벤트를 준비했을 것이오

○ 김형욱의 영화적 상상력 ○
김형욱은 훗날 미국 망명 중에 박사월이라는 청년(본명 김경재
現민주당 국회의원)이 대필한 자서전 에서 이 1.21사건 직후, 정일권과의
대화를 하던 중 "우리도 무슨 결사대라도 한번 보내어 북한 당국자의
혼구멍을 내줘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소. 실미도
특공대의 창설이 면밀한 검토 끝에 나온게 아니라 이처럼 즉흥적이었다는
것이오. 게다가, 당시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가 있었으니 "더티더즌"
이라는 영화요. 대략, 12명의 범죄자들로 구성된 특공대를 적진에
침투시켜 독일군을 섬멸하고, 특공작전을 완수하는 오락영화요. 증거는
없으나, 김형욱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상상력으로 실미도 684부대를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소.

○ 어차피 그들은 죽을 목숨 ○
김형욱이 자서전에서 밝히 듯, 실미도 684부대의 목적은 벌집을 쑤시듯
평양시내를 헤집어 놓아 북한당국자의 혼구멍을 빼놓는 일이었을 것이오.
애초에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황당무계한 작전이었고,
정예 특전병력이나 첩보부대를 희생시킬 이유가 없었을 것이오. 실미도
684의 임무는 오직,무자비한 파과활동으로 평양을 뒤집어 놓으면 될
뿐이었고, 때문에, 특수전 훈련이 아니라 살인훈련을 받은 것이오.
고도의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들이 이런 황당무계한 작전에 속을리
없다는 것을 김형욱은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생각할 머리가 없거나,
생각할 처지가 안되는 범죄자들과 인생막장의 낙오자들을 이용하고
죽이려 한 것이라 생각하오.


3. 그렇다면 1.21부대는 청와대를 까러왔을까?

○ 김신조의 124군 부대도.....○
31명의 특공대로 김일성을 암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31명의
공비들이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도 불가능하오. 아무리 간첩들이
대단한 전투력을 가졌다 해도 슈퍼맨은 아니오. 게다가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 역시 너무나 어수룩했소. 그들은 남하 도중 만난 나뭇꾼을
잡았다가 "우리가 곧 남조선을 해방할 것이다. 힘들겠지만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라"라고 하고는 풀어 주었소. 아햏햏 하지 않소?
그리고는 결국 전멸당했소.

○ 김일성이 바보인가? 왜 이런 뻘짓을.....○
김일성이 가짜다. 마적출신이다. 엽색행각을 일삼는 변태다....
여러가지 욕을 하오. 하지만 최소한 김일성은 바보는 아니고
전략전술에서 최소한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이승만 대통령 등보다는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하오. 그는 6.25 개전초기 전격전을
구사하여 성공했소. 아마도 서양 열강이 아닌, 제3세계의 작은나라에서
이같은 전술을 성공시킨것은 최초였을 것이고 이승만이나 신성모는
이같은 전술은 꿈도 꾸지 못한채 승리를 호언했소, 아마도 미국 조차도
김일성의 전술에 놀랐을 것이고 스탈린조차 북한군이 전격전을 성공
시킬수 있을지 반신반의 했을 것이오. 그런 그가 왜 이런 황당한
현실성 없는 작전을 명령했을까? 김일성은 박정희를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알고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31명의 특공대를 "가서 죽으라고" 보낸 것이오.

1968년은 대단한 해였소. 일단, 프에블로호가 나포되고,
1.21사태(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가 일어났고 제주도 서귀포에서
간첩선이 발각되어 격침되어 20명 가까운 간첩들이 죽거나 체포되었소
그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무모한 간첩침투가 그해 늦가을 강원도 삼척
울진지역에 있었소. 무려 120 여명이 침투하여 110명이 사살되고
수명이 체포되었소. 96년도 처럼 간첩 실어 나르려다 얼결에 조난당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침투였소.

솔찍히 이같은 대남공작은 북한의 입장으로 볼때 뻘짓거리에 불과했소.
일단, 무모한 침투로 살길을 잃은 무장공비들은 첩보원이나 혁명전사가
아닌, 아닌 총을 든 강도들로 전락하여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남한
국민들 사이에 반공사상이 확고해지게 되었소. 그다음으로, 남한
전력이 강화되었소 예비군이 창설되고, 미국으로 부터 100만정의
카빈소총등 예비군 물자를 공여받은 것이오. 까짓 고물총 100만정이
대수냐고 하실 햏도 있겠으나,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에
그 정도 무기는 엄청난 전력강화였고 당시 프랑스같은 선진국도 반자동
총을 쓰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전력강화라 할 수 있소.
마지막으로, 주한미군이 계속 주준하게 되었소. 당시 주한미군 철수
논란이 있었고, 실제로 일부 병력의 철수가 있었으나, 당초 계획보다는
철수규모가 줄어들었고 월남전 참전과 함께 한미공조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소.


○ 통일전선전술 또는 제2전선 구축 ○

이제 밖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당시 1968년도의 굵직한 가선을
꼽으라면 단연 월남전의 확전이라 할것이오 그해 구정을 계기로
월남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베트남 공산주의자의 공세와
공산권의 지원은 절정에 달했소.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세계
공산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하였고 심지어 노선이 비슷한
사회주의자는 물론,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했소. 당근 베트남의
공산화를 위해 짱개와 로스케들이 무기와 자원을 주었고 일부,
참전하기도 했소.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유럽에서 전쟁(공산주의 침략)이 있을
경우, 아시아에서 병력을 빼고, 중동에서 터진다면 유럽에서 빼는
식이었소, 아직 WIN-WIN전략이 나오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오. 공산당은
이를 이용한 것이오. 중국과 소련 공산당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세계공
산화를 위한 희생을 요구했거나 김일성이 자발적으로 제2 전선을
구축했을 것이오. 즉, 미군의 뒤통수를 줄기차게 야려서 베트남에
아태지역의 군사력을 올인(ALL-IN)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오.
1.24군부대의 습격은 소란을 일으키려는 작전, 그리하여 적을 붙잡
아두려는 성동격서의 전술이었소. 성동聲東(동쪽에서 소리내고- 남한에
줄기찬 도발로 미군의
발을 묶고) 격서擊西(서쪽을 친다- 남한에서 병력을 빼오지 못해 보강이
덜된 미군을 베트남 에서 공략한다)

북한 특공대의 목표는 남한 공산화가 아니었소. 김일성이 그토록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오. 그 당시 남한은 누가 보다라도 소위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아니라는 것은 뻔했소. 북한 특공대는 되도록 자주
눈에 띄이고 되도록 많은 난동을 부리고, 되도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는 죽어버리는 것이 목표 였소. 그러므로 당근 빠떼루 효율적인
소수 은밀한 테러 보다는 요란하고 실패가 뻔한 완전무장 병력의 대규모
습격을 택한 것이라 생각하오.

요즘처럼 이념이 사라지고 실리를 추구하는 세상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1968도에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소. 체 게바라가
온두라스의 공산혁명을 위해 쿠바의 장관직을 사임하고 게릴라전 을
펼치다 죽던 그 시대요. 그 시대라면 당연한 일 일 수 있소.

어쨋건.... 소햏의 생각은 학문적인 바탕이나 역사의 인식을 토대로 한것이
아닌 소햏의 직관에 의존하고 상식에의한 추리이므로 절대적으로 맞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소햏의 생각이 맞는다면, 북한에서 내려온 31명의
124군부대나, 울진 삼척에 침투한 120명은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의
세계공산화라는 망상을 위해 민간인 학살 등 온갖 악업을 쌓은 채
(특히 울진삼척 침투공비) 희생당한 역사의 죄인이자 희생양이고,
실미도 684부대와 기간병들은 정치인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몇몇의
면피를 위해 희생된 정말 불쌍한 희생자가 아닐까 하오.




  
출처: 울동네특공대 님

<출처---공수한가족 / Special Ops 님>

 

 

 

 

 

첨부파일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수정 취소

/ byte

댓글 입력

이름 비밀번호 관리자답변보기

확인

/ byte


*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